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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님,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리를 가지고 다투어 보고 싶었습니다.
법리를 가지고 다투어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람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협상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었습니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기록관장과 상의할 일이나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국가기록원장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 것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해 놓은 말도 뒤집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의 드리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천리길을 달려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 맞는 열람의 방법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에 맞는 방법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적절한 서비스가 될 때까지 기록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맞습니까?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는 서비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언제 쯤 서비스가 될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입니까?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 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에 달려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신지요?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섭니다.

하느님께서 큰 지혜를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16일
16대 대통령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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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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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블로그에 글을 적고 있지만, 사실 트위터에 장문으로 썼던 글을 트윗하지 않고 블로그에 옮기며 글을 정리하고 있다.
내가 전문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니, 파워블로거나 전문블러거처럼 이러저러한 관련자료는 링크하지 않을테니.. 양해 바란다.

이제부터 써내려가련다.


늘 트위터를 하면서.. 노무현을 떠올린다.

오세훈이 (제멋에 사는)멋진 남자답게 전격사퇴를 발표하고
진보진영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제분위기인 지금

신발.. 3년전 노무현을 ‘뇌물현’이라 부르며 유행어를 만들던 떡검의 작태를 또다시 보게 되었다.
늘 신비주의를 구사하며, 수사상 비밀이어야 한다던 수사과정이 매일 언론에 브리핑되고 있다.

"곽노현 교육감 2억 뇌물" “관련증거 명백하니 구속 자신"

"뇌물현"이 유행어가 되던 3년전
진보진영의 모든 정치인, 논객들이 똥꼬에 불 붙은 듯 지랄발광을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뇌물을 받았다며, 그는 파렴치한이고 국민 모두를 속인 위선자로 몰았다.

지금 조용히 늘어나고 있는 "진보 스스로 단결하라"는 멘션처럼 당시에도 진보의 분열을 막고 대동단결하자는 몇 분의 진실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면 노무현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봉하마을에서 웹2.0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던 노무현을
수구진영서 아방궁이라며 발길을 막고,
대통령 기록물을 핑계로 서버를 뺏어 인터넷세상과 고립시킨 후
수구언론은 물론 진보성향 언론마저 한결같이 노무현을 위선자로 만들고,
노무현을 따르거나 동조하던 진보성향 인사들마저 하나둘 발길을 끊고,
각종 포털에선 보수진영/수구진영의 무차별 댓글로 말 한마디, 글 하나 조차
노무현을 비방하던 시절.. 트위터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늘 상상을 해본다.

당시 노무현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상사람 모두가 등을 돌리는 그 순간, 그는 절망했을까? 희망을 보았을까?

난 그가 자살한 이유는 절망해서라고 판단한다.

그당시 트위터가 지금처럼 활발해졌다면,
그는 ‘진보의 자정능력’을 보았을 테고..
지금도 그 잘난 진보의 글밥먹는 새끼들은 자신들의 고절한 양심상 곽노현은 파렴치한으로 만들며 자신의 글을 세상에 뽐내는 가운데서도, 시민들이 스스로 진보를 외치며 단결하는 모습을 실시간 확인하였을 게다.

진보의 희망을 보았을게다.

그 희망에 무한한 희열을 느끼며, 불꽃같은 유서를 쓰고 자살을 했든..
그 희망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며, 얼음같은 이성으로 재판에 임했을 것이다.

분명 차분한 글귀와 산책으로 삶을 마무리하지 않았으리라..

다시 한번 고하지만..
신발.. 니들 잘난 거 잘 안다.
관련법이니, 법리, 헌법에 입각한 그 차분한 논리와 글실력 인정한다.
고매하고 고절한 양심에 맞게 청렴결백하게 사는 니들의 삶을 존경한다.

근데, 신발놈들아..
니들의 자랑질로 진보진영이 무너지게 만들지 마라.
니들의 영웅심리에 진보진영이 분열되게 하지 마라.

검찰이 진보에게 벌써 수차례 던진 화두다.

노무현의 뇌물수수가 그러했고, 수구가 이겼으며..
한명숙의 뇌물수수가 그러하고, 치열한 공방 중이며..
곽노현의 2억지원이 그리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해도 벌써 3번째다.

검찰이 던진 화두는 그야말로 평생을 두고 논의를 해도 답이 나올까 말까할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만큼이나 어려운 숙제다.

어려운 숙제니 잘났다고 생각하는 진보 글쟁이들, 정치인들, 행동가들이 죄다 달려들어 자신의 가치관이, 양심이, 행동이 최선인양 뽐낸다.
뽐내는 건 상관없다. 지들 잘난 멋에 진보진영에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누가 욕을 하겠는가?

허나, 스스로 멋진 글귀 하나에 자존감을 느끼며 희열에 부르르 떨지 말고..
진보 전체를 보아달라!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새겨달라.

곽노현 교육감 2억 지원은 법적이든, 도덕적이든 모든 사람마다 달리 판단될 사안이고, 이로 인해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다만.. 검찰이 원하는 건 이러한 화두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하고 바람직한 결론이 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검찰이 원하는 건.. 진보 스스로 분열되고 무너지는 것 아닌가?

호떡집에 불났다고 불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일단 더 확산되지 않도록 불을 끄되..
불난 원인을 파악하고
방화사건이면 범인이 남긴 증거를 확보하고,
실수에 인한 실화면
재발하지 않도록 원인 규명 및 예방활동을 강화하고.. 그래야 현명한 사람 아닌가?

검찰이 봉하마을에 불을 질러 노무현에 (자의든 타의든) 그 불 속에서 타 죽었건만..
그의 무덤가에서 흘린 눈물은 도대체 뭔가?
그냥 슬퍼서 운거냐?
뭔가 깨달아서 운거냐?
남들이 우니 따라 운거냐?

신발.. 진화하는 수사기술만큼 검찰이 진화하는 게 보이면, 진보진영도 그만큼 진화해야지.

3년전 일을 또 겪어야 하고, 재보궐/총선/대선 죄다 참패를 해야.. 또 곽노현 무덤가에서 눈물 흘린거냐?

진보 스스로 단결하도록 도와라.

MB정권의 검찰이 던진 화두는 정의에 대한 화두가 아님을 다들 아는 사실 아닌가?
근데 왜 바보들처럼 정의에 대한 글만 쓰면서 곽노현을 자신의 잣대로 찢어발기는가?

니들 정의대로 찢어발긴 건 “노무현"으로 충분치 않냐? 난 충분타 생각한다.

이제 그만 떠들고, 진보 스스로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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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무한도전 김태호PD 노무현을 추모한 올 마지막 방송 (언론악법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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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 만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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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5년 후 그때 검사들 “노 너무 몰아 붙였다” “MB 마음 놓인다”
[뉴스 쏙]‘노 대통령-평검사 대화’ 그때 그 검사들의 바뀐 세상 바뀐 생각
»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검찰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맞장을 뜨던’ 검사들이 정권이 바뀌자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는 말이 곳곳에서 나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의 행보를 두고는 ‘코드수사’ ‘청부수사’라는 비판도 무성하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9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검사와의 대화’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열혈 평검사’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검찰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면서 인터넷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독하게 맞섰던 평검사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비아냥섞인 글들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검찰과 세상은, 과연 바뀌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5년 전처럼 그들은 대통령과 맞장 토론을 벌일 기개를 갖고 있을까?

<한겨레>는 당시 ’검사와의 대화’에 참가했던 평검사들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5년 전과 달리 극도로 말을 아꼈다. 당시 평검사회 회장이었던 허상구 법무부 범죄예방기획과장은 “인터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개별적으로 접촉했던 검사들도 상당수 문전박대하며 말을 아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분위기는 달라졌다. 몇몇은 입을 열었지만 “현 정부는 참여정부에 비해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놓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검사도 있었다. 현 정부에서 참여정부 시절 위축된 검찰의 권한을 되찾아야 한다는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과연 5년 전 소장검사들이 보여준 소신은 ‘유통기한’이 5년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 노 대통령-평검사 대화

질문1. 검사와의 대화를 추억해달라


검사와의 대화에 참석했던 검사들은 모두 10명. 이들은 서울(6명)과 지방(부산, 인천, 전남, 충북)에 흩어져 있었다.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만남 자체가 쉽지 않은데다 ‘민감한 질문’에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5년 전 사무실 문만 열면 만날 수 있었던 그들은 이제 부속실을 거쳐야 만날 수 있는 중간간부로 바뀌어 있었다.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뀐 세월뿐 아니라 검찰 조직에서 각 개인의 위상 변화도 말을 아끼게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지난 6일 어렵게 시간약속을 해 찾아간 수도권 지역 검찰청의 한 부장검사는 반갑게 대화를 나누다가 “이명박 정부의 검찰 정책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전자결재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된다”며 기자를 부랴부랴 방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검사들도 ‘검사와의 대화’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에서는 쉽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를 ‘지우고 싶은 추억’ 쯤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때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여유도 보였다.

한 검사는 “한 마디로 노 전 대통령 손바닥에서 놀았던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토론회장에 가보니 대통령은 강의하고 우리는 학생처럼 앉게 자리가 배치돼 있더라고요. 항의 끝에 원형 토론 무대로 바꿀 수 있었지요.” 노 전 대통령은 ‘토론’이 아니라 ‘강화’를 작정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검사들에게 “왜 그때 그렇게 대통령에게 감정적인 질문공세를 펼쳤냐”고 물었다. 검사들의 발언 태도 때문에 청문회 직후 세간에는 ‘검사스럽다’ ‘검새’라는 유행할 정도로 후폭풍이 적지 않았다.

한 검사는 “우리는 검찰중립을 최대한 설득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갔지만 토론회에 가보니 노 전 대통령이 ‘너희는 나쁜 놈이다. 그러니까 내말을 들어라’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우리 반응도 자연히 거칠어졌다”고 말했다. 토론회 때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 기억밖에 없다는 그는 “감정적인 질문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았고 결국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우리가 스스로 제공한 꼴이 됐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찰중립을 요구하는 검사들에게 “검찰 수뇌부를 믿지 않는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은 그날 저녁 사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검찰 독립’을 명분으로 나선 평검사들이 오히려 수뇌부의 단명을 재촉한 결과가 됐다.

“우린 노 전 대통령 손바닥서 놀았다”
‘넌 나쁜놈 이니까’ 식으론 개혁 안돼
참여정부 5년? “긴 터널 지났다”

질문2. 참여정부와 현정부를 비교한다면

씁쓸한 추억 때문인지 검사들은 아직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개혁 과정 자체보다 노 전 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는 검사들도 많았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는 느낌도 들었다. 한 검사는 “검찰권한 축소가 시대적 대세라고 하지만 아무리 죄있는 사람이라도 면전에서 ‘너는 나쁜 놈이니까 이제 죽었어. 각오해’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개혁의 상궤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참여정부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일선 검사는 상관없다”는 판에 박힌 모범답안을 내놓는 검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참여정부 5년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다행이라는 속내를 주저없이 드러냈다.

한 검사는 “솔직히 법질서 준수를 강조하는 현 정부가 참여정부에 비해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일부는 노무현 정부 시절 법원 쪽에 무게중심이 쏠렸던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영장발부 관행 등이 현 정부에서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정권과 맞서며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까지 파헤쳐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던 검찰이, 이제는 ‘정치 검찰’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정치검찰 논란엔 “절대 아니다”
일부선 “갑자기 말 잘들으면 안돼”
촛불 과잉수사 법무장관 비판도

질문3.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 7월 <한겨레>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60.5%가 ‘정치 검찰’이라는 비판에 대해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문화방송> ‘피디수첩’ 이나 한국방송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수사, 참여정부 실세와 민주당 인사들을 겨냥한 수사 등을 놓고 ‘표적수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비판에 대해 검사들은 대부분 “절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한 검사는 검찰 수사가 참여정부와 민주당 인사들을 주로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투서와 진정이 쏟아진다”며 “그건 권력의 속성”이라고 했다. 표적수사는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대통령 측근 수사는 왜 제대로 안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정권 초기라 한나라당 정치인 이름이 나오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있는 촛불집회 관련자와 누리꾼 등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이 사건은 정치사건이 아니라 공안사건”이라며 “위법 사실이 있으면 기소하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똑같은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는 검사도 있었다. “사람(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말 잘 듣고 그러면 안된다. 사람이 누구든지 검찰이 한결같아야 욕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한 검사는 ‘법무부 장관’을 직접 겨냥했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6월 임채진 총장 등 검찰 수뇌부가 촛불집회 사법처리 수위를 놓고 고심하는 와중에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다’며 사법처리를 주장하고 나섰다”며 “장관이 나서면 안된다”고 했다.

다른 검사도 “김 장관은 옛 공안 출신이라서 요즘 정서와 동떨어진 말을 많이 해 부담스럽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장관을 움직이는 또다른 힘’에 대해서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5년전‘대화’ 검사들“노 너무 몰아 붙였다” “MB 마음 놓인다”
▶금융위기 잠재워도 경기후퇴 막을 수 없다
▶‘기러기 아빠’ 허리 더 휜다
▶최 방통위장·구 YTN 사장…“두어번 외부서 만나”
▶서울보다 비싼 베이징 한국산 라면
▶일본, 노벨상 떠들썩한데…한국선 논문 표절 국제망신


기사등록 : 2008-10-09 오후 07:45:26 기사수정 : 2008-10-10 오전 08: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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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위키백과


생애

[편집] 어린 시절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에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1963년경남 김해의 진영중학교를,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전방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동향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양숙1973년 결혼해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편집]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딩기)[2]를 즐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3]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구속되었고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편집] 정치 입문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편집] 정치 활동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4] 그리고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한 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듬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대한민국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의원과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1997년 11월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5]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2000년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편집]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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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지방선거(6•13)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를 하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 지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이상 가나다순)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를 차례였는데, 이변은 바로 그 광주 땅에서 시작된다. 부산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당당히 득표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과 함께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노무현은 당시 광주 1위를 기록한 다음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노풍: 盧風),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경선 끝자락이었던 경기 경선에서는 정동영이 1위 차지.)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빌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민주당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와 김홍걸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 시장을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후보로 내세움.)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에 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에서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평소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 정풍(鄭風)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 민주당에 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이하 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용학(새천년 민주당 대변인 등 당직 역임)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 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 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여론조사1: 노무현 승리, 여론조사2: 무효-이회창 지지율 낮음, 역선택 의심)

후보 단일화에서 낙마한 정몽준 전 후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유세를 나서는데 망설여 단 한차례의 유세를 나가는데 그쳤고, 선거 전날 저녁에는 급기야 후보단일화를 철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1년 전 지지율 한자릿수에 그쳤던 노무현이 일국의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어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참여정부의 신호탄을 쏘았다.

[편집] 대통령직 수행

[편집]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2004년 2월 24일)

2003년 5월 14일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5월 14일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 참여정부 출범.[6]

2003년 2월 26일: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 국회 통과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조각 발표, 새 내각 출범.

2003년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대통령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 이 함께하는 토론.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지적해 한때 유행어가 됐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2003년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오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총련의 저지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건이 이 발언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03년 10월 10일: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등 거대야당의 국정
발목잡기가 극에 달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 밖에도, 취임 1년차에는 2003년 2월 25일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5월 15일 조지 W. 부시와 정상회담을 하였다. [7] [8]

[편집]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2005년 2월 24일)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9] 탄핵안 가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권한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2004년 4월 15일: 대통령이 당적을 두고 있는 여당 열린우리당이 4·15 총선에서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10]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그에 준하는 국민투표를 통하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었다.

[편집]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2006년 2월 24일)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특별법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편집]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2007년 2월 24일)

2006년 11월 18일에 권양숙과 노무현이  APEC에서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2006년 11월 18일권양숙과 노무현이 APEC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2007년 1월 9일 : 노무현 대통령이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개정을 하겠다는것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2007년 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색다른 표현을 썼다. 종래 대통령의 임기말 탈당이 대선을 앞둔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등떠밀리듯 이뤄진 것에 비해, 자신의 탈당은 개헌 등의 상황에 따른 자발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편집]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2007년 6월 8일 : 노무현 대통령이 6월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을 비하하는 내용을 발언하였으며, 이에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선거법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중립의무라는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2007년 10월 4일 :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관계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11][12][13]

[편집] 퇴임후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을 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봉하마을에 대한 관심이 또한 누리꾼의 화제가 되었다.[14]

임기중에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봉하마을에는 그를 보기 위한 관광객이 몰려드는 등 인기가 없던 임기중과는 달리 퇴임후에 오히려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퇴임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터넷에 오른 한 사진이 기화점이 되었는데, 그 사진에서 노무현은 동네 매점에서 사복 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편,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에서 국가기록물 유출 건에 대하여 노 전 대통령을 압박한 바 있다.

[편집] 외교정책

노무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외국을 가장 많이 순방한 대통령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로마교황청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15] [16]

[편집] 미국

2005년 11월 18일에 부시 대통령과 부산에서 만났다.
2005년 11월 18일부시 대통령과 부산에서 만났다.
2003년 10월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10월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과 부시가  APEC에서 만났다.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과 부시가 APEC에서 만났다.
2006년 9월 14일의 백악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2006년 9월 14일백악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생각되어졌는데 2002년 대선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취임 후 그의 부담이 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좌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독자노선을 걸은 흔적은 크게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미국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미국 친화적인 모습이 많았다.

이런 정책 때문에 민주노동당 등 한국의 좌파 정치세력들은 노무현 정권을 친미정권이라고 비판한다.[출처 필요]

최근에는 미국에 지나치게 '퍼주기'식으로 일관한다고 비판을 받은 이명박 현 대통령에 비해 비교적 실리를 챙긴 대미 외교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출처 필요]

[편집]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전범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언론과 야당으로 부터는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대북유화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의 노무현 대통령
2006년의 노무현 대통령

2006년 일본의 일본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 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2006년 11월 에이펙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총리와의 양자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제안과 관련된 파문이 커지자 이를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에 전적으로 책임을 돌렸다.

[편집] 주요 정책

  • 노무현 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이 부분의 본문은 참여정부입니다.

[편집] 유행어

  • TV토론 등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발언을 하여, 이 발언이 대통령 취임 초기 한동안 유행하였다. 당시 KBS개그콘서트의 개그맨 김상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를 흉내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이 유행어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맞습니다맞고요’라는 한글 주소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결된다. [17]
  • 일부 보수언론의 대통령 탓하기에 질린 네티즌 사이에서 그와 전혀 무관한 인터넷 기사 리플(덧글)란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 전직 국방부 장관 등의 군 인사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말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발언이 플래시, UCC 등으로 편집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연설 내용을 리믹스해 랩으로 만든 UCC도 있었다.
  • 참여정부 시기, 삼성의 경제적 비중이 확대되고, 삼성의 전방위 로비활동이 일부 드러나면서 '삼성공화국' 이란 말이 유행했다.

[편집] 수상 경력

[편집] 함께 읽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추광규. “노무현, 새로운 애칭 생겼다....'노공이산'”, 《오마이뉴스》.
  2. 딩기란, 무동력선이며 엔진과 선실을 갖추지 않은 1-3인용 요트로 바람의 힘으로만 갈 수 있다. 주로 스포츠 운동에 사용. 일부 비판자들이 이를 호화요트라고 비난하였지만, 선실과 엔진을 갖춘 크루저(호화요트)와는 다르다.
  3.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하였다.
  4. 여소야대 몰리니까 지역구도 해체?
  5.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이회창과 연대를 결정하여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의 선택을 놓고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여러분과 같이 일하게 된 것은 기쁨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동안 지고 있던 짐을 덜게 된 기분"이라는 말로 사과를 대신했다.
  6.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연설
  7. 권경복 기자. “[韓·美 공동성명] 한국 ‘군사조치’로 해석될까 반대 ”, 《chosun.com》, 《조선일보》, (2003년 5월 16일). 2008년 5월 27일에 읽어봄.
  8. 신정록 기자. “[韓·日정상회담] 고이즈미 “북한과 대화하겠다””, 《chosun.com》, 《조선일보》, (2003년 2월 25일).
  9.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10.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
  11. 2007년 남북 정상 회담 관련 뉴스
  12. 해럴드 경제 2007년 9월 31일자
  13. 아시아 경제 2007년 10월 3일자
  14. 노무현 대통령 귀농..
  15. 盧대통령 해외순방 23차례 49개국 역대 최다 노대통령 유럽 3개국 순방 의미
  16. 盧대통령 해외순방 역대 최다…23차례 49개국 방문
  17. '맞습니다 맞고요' 청와대 기증, 《매일경제》, 2003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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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위키백과


  • 1946. 8. 6(음력) 출생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
  • 1959. 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
  • 1960. ‘우리 대통령 이승만’ 작문에 항의 백지동맹 주도
  • 1963. 김해 진영중학교 졸업
  • 1966.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53회)
  • 1968. 3. 8. 육군 입대
  • 1971. 육군 상병 만기제대 (을지부대)
  • 1973. 권양숙 여사와 결혼
  • 1975. 3.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 1977. 대전지방법원 판사 재직
  • 1978. 5. 5. 변호사 개업 (現 법무법인 부산)
  • 1981. 1. 22 부산일보 생활법률상담 연재 (1981. 1. 22. ~ 1982. 6. 15)
        (미 문화원 방화사건 변론 후 법률상담 연재 중지)
  • 1982. 6. 15. 미 문화원 사건 첫 공판
  • 1984.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85.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 1987. 2. 10.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가담 후 연행 (총 798명 연행)
  • 1987. 2. 12. 4차례 구속신청 진상 조사
        - 노무현 변호사 4차례 연속 구속영장신청에 대한 대한변협과 부산변협 진상 조사
  • 1987. 2. 13.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관련 구속자 인권유린 관련 조사
  • 1987. 6.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 1987. 9. 대우조선 분규 관련 구속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
  • 1988. 4. 28. 제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부산동구) 당선
  • 1988. 6. 15. 변호사 업무 정지 해제
  • 1988. 6. 부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결성 참여
  • 1988. 12. 31. 5공 청문회 (전두환 증인에 대한 청문회 - 명패사건)
  • 1990. 3. 3. 3당야합 규탄 및 민주당 창당 지지대회
  • 1991. 9. 16. 신민, 민주 야권통합 (통합협상 대표)
  • 1991. 9. 17. 통합민주당 대변인
  • 1992. 3. 24. 제14대 총선 (민주당, 부산동구) 낙선
  • 1992. 11.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물결유세단 단장
  • 1993. 3. 11. 민주당 전당대회 (최연소 최고위원 당선)
  • 1994. 10. <여보 나 좀 도와줘> 출판
  • 1995. 2. 선거 조직관리 S/W ‘리더메이커’ 개발
  • 1995. 2. 24. 민주당 임시전당대회 (민주당 부총재 선출)
  • 1995. 5. 9.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 출마 선언
  • 1995. 5. 12.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선출 (부산시당 전당대회)
  • 1995. 6. 27. 부산시장 선거 낙선
  • 1996. 1. 19. 종로 출마 관련 기자간담회
  • 1996. 4. 11. 제15대 총선 출마 (민주당, 서울종로) 낙선
  • 1996. 11. 10. 국민통합추진회의 창립대회
  • 1997. 3. 7. 하로동선 음식점 개업
  • 1997. 9. 3. S/W ‘우리들3.0’ 개발
  • 1997. 9. 25.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 수필집 공저
  • 1997. 11. 13.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기자회견 (부총재)
  • 1997. 11. 26. 제15대 대선 수도권 특별유세단 (파랑새유세단) 단장
  • 1998. 7. 21.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서울종로) 당선
  • 1999. 2. 9. 제16대 총선 부산, 경남지역 출마 기자회견
  • 2000. 1. 25. 새천년민주당 지도위원
  • 2000. 4. 13. 제16대 총선 (부산 북구 강서 을) 낙선
  • 2000. 5. 24. 대선출마 공식선언 기자간담회
  • 2000. 6.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 창립총회
  • 2000. 8. 7.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
  • 2001. 7. 20. ‘자치경영연구원’ 부산본부 설립
  • 2001. 12. 10.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및 후원회 / 대선출마 공식선언
  • 2002. 1. 17. 노무현과 네티즌의 만남
  • 2002. 3. 9. ~ 2002. 4. 27. 민주당 국민경선 / 대통령 후보 선출
  • 2002. 10. 20. 개혁국민정당 발기인 대회
  • 2002. 11. 3. 서울 국참 발대식 / 후보단일화 방침 발표
  • 2002. 11. 25. 후보단일화 확정
  • 2002. 12. 19. 제16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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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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