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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5년 후 그때 검사들 “노 너무 몰아 붙였다” “MB 마음 놓인다”
[뉴스 쏙]‘노 대통령-평검사 대화’ 그때 그 검사들의 바뀐 세상 바뀐 생각
»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검찰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과 ‘맞장을 뜨던’ 검사들이 정권이 바뀌자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냐는 말이 곳곳에서 나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의 행보를 두고는 ‘코드수사’ ‘청부수사’라는 비판도 무성하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9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검사와의 대화’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열혈 평검사’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검찰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면서 인터넷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독하게 맞섰던 평검사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비아냥섞인 글들도 많이 올라오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검찰과 세상은, 과연 바뀌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5년 전처럼 그들은 대통령과 맞장 토론을 벌일 기개를 갖고 있을까?

<한겨레>는 당시 ’검사와의 대화’에 참가했던 평검사들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5년 전과 달리 극도로 말을 아꼈다. 당시 평검사회 회장이었던 허상구 법무부 범죄예방기획과장은 “인터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개별적으로 접촉했던 검사들도 상당수 문전박대하며 말을 아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분위기는 달라졌다. 몇몇은 입을 열었지만 “현 정부는 참여정부에 비해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놓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검사도 있었다. 현 정부에서 참여정부 시절 위축된 검찰의 권한을 되찾아야 한다는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과연 5년 전 소장검사들이 보여준 소신은 ‘유통기한’이 5년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 노 대통령-평검사 대화

질문1. 검사와의 대화를 추억해달라


검사와의 대화에 참석했던 검사들은 모두 10명. 이들은 서울(6명)과 지방(부산, 인천, 전남, 충북)에 흩어져 있었다.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만남 자체가 쉽지 않은데다 ‘민감한 질문’에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5년 전 사무실 문만 열면 만날 수 있었던 그들은 이제 부속실을 거쳐야 만날 수 있는 중간간부로 바뀌어 있었다.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바뀐 세월뿐 아니라 검찰 조직에서 각 개인의 위상 변화도 말을 아끼게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지난 6일 어렵게 시간약속을 해 찾아간 수도권 지역 검찰청의 한 부장검사는 반갑게 대화를 나누다가 “이명박 정부의 검찰 정책이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전자결재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된다”며 기자를 부랴부랴 방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검사들도 ‘검사와의 대화’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에서는 쉽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를 ‘지우고 싶은 추억’ 쯤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때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여유도 보였다.

한 검사는 “한 마디로 노 전 대통령 손바닥에서 놀았던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토론회장에 가보니 대통령은 강의하고 우리는 학생처럼 앉게 자리가 배치돼 있더라고요. 항의 끝에 원형 토론 무대로 바꿀 수 있었지요.” 노 전 대통령은 ‘토론’이 아니라 ‘강화’를 작정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검사들에게 “왜 그때 그렇게 대통령에게 감정적인 질문공세를 펼쳤냐”고 물었다. 검사들의 발언 태도 때문에 청문회 직후 세간에는 ‘검사스럽다’ ‘검새’라는 유행할 정도로 후폭풍이 적지 않았다.

한 검사는 “우리는 검찰중립을 최대한 설득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갔지만 토론회에 가보니 노 전 대통령이 ‘너희는 나쁜 놈이다. 그러니까 내말을 들어라’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우리 반응도 자연히 거칠어졌다”고 말했다. 토론회 때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 기억밖에 없다는 그는 “감정적인 질문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았고 결국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우리가 스스로 제공한 꼴이 됐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찰중립을 요구하는 검사들에게 “검찰 수뇌부를 믿지 않는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김각영 당시 검찰총장은 그날 저녁 사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검찰 독립’을 명분으로 나선 평검사들이 오히려 수뇌부의 단명을 재촉한 결과가 됐다.

“우린 노 전 대통령 손바닥서 놀았다”
‘넌 나쁜놈 이니까’ 식으론 개혁 안돼
참여정부 5년? “긴 터널 지났다”

질문2. 참여정부와 현정부를 비교한다면

씁쓸한 추억 때문인지 검사들은 아직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개혁 과정 자체보다 노 전 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태도를 문제삼는 검사들도 많았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는 느낌도 들었다. 한 검사는 “검찰권한 축소가 시대적 대세라고 하지만 아무리 죄있는 사람이라도 면전에서 ‘너는 나쁜 놈이니까 이제 죽었어. 각오해’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개혁의 상궤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참여정부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들의 평가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일선 검사는 상관없다”는 판에 박힌 모범답안을 내놓는 검사도 있었지만, 대부분 참여정부 5년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다행이라는 속내를 주저없이 드러냈다.

한 검사는 “솔직히 법질서 준수를 강조하는 현 정부가 참여정부에 비해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일부는 노무현 정부 시절 법원 쪽에 무게중심이 쏠렸던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영장발부 관행 등이 현 정부에서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정권과 맞서며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까지 파헤쳐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던 검찰이, 이제는 ‘정치 검찰’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정치검찰 논란엔 “절대 아니다”
일부선 “갑자기 말 잘들으면 안돼”
촛불 과잉수사 법무장관 비판도

질문3.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 7월 <한겨레>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60.5%가 ‘정치 검찰’이라는 비판에 대해 “공감한다”고 응답했다. <문화방송> ‘피디수첩’ 이나 한국방송 정연주 전 사장에 대한 수사, 참여정부 실세와 민주당 인사들을 겨냥한 수사 등을 놓고 ‘표적수사’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비판에 대해 검사들은 대부분 “절대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한 검사는 검찰 수사가 참여정부와 민주당 인사들을 주로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에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투서와 진정이 쏟아진다”며 “그건 권력의 속성”이라고 했다. 표적수사는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대통령 측근 수사는 왜 제대로 안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정권 초기라 한나라당 정치인 이름이 나오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있는 촛불집회 관련자와 누리꾼 등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이 사건은 정치사건이 아니라 공안사건”이라며 “위법 사실이 있으면 기소하는 것이 검찰의 역할”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똑같은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는 검사도 있었다. “사람(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말 잘 듣고 그러면 안된다. 사람이 누구든지 검찰이 한결같아야 욕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한 검사는 ‘법무부 장관’을 직접 겨냥했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6월 임채진 총장 등 검찰 수뇌부가 촛불집회 사법처리 수위를 놓고 고심하는 와중에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촛불집회에 배후가 있다’며 사법처리를 주장하고 나섰다”며 “장관이 나서면 안된다”고 했다.

다른 검사도 “김 장관은 옛 공안 출신이라서 요즘 정서와 동떨어진 말을 많이 해 부담스럽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장관을 움직이는 또다른 힘’에 대해서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권은중 기자 details@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5년전‘대화’ 검사들“노 너무 몰아 붙였다” “MB 마음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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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8-10-09 오후 07:45:26 기사수정 : 2008-10-10 오전 08: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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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 http://news.kbs.co.kr/event/2008/president/

일단 프로그램 제목에서 아쉬움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차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국민과의 대화가 아닌 대통령과의 대화이다.

제목부터 트집잡는다고 생각할 분도 계시겠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프로그램의 안방마님과 사랑방손님의 주체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늘 국민을 섬기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곱씹어보면 더 아쉬운 대목이다.

"대통령과의 대화 질문있습니다란.. 왠지 국민이 대화의 장을 만들어 놓고 대통령을 초대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품긴다. 물론 손님이라고 예의를 다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초대하는 입장에서 정성껏 준비를 해야만 손님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즉, 대화의 주체는 동일하겠지만 그 위치가 국민과의 대화와 달리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준다. 임기 초기부터 기우뚱되는 정책들에 대해 공통된 평가는 바로 전 정권의 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하, 반대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TV 프로그램의 제목도 그러한 일례가 되지 않을까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암튼, 미산 쇠고기 이슈와 촛불시위에 따른 강경진압에 따른 국민여론 악화 등.. 많은 악재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던 국민과의 대화가 어렵사리 마련되었다.

KBS 홈페이지를 통해 본 질문들은 대부분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동안 행해온 정책들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가 느껴진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불평불만은 "대통령과의 대화 질문있습니다!"에 채택될 명분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왜냐면 단지 정책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고, 어떤 근본적인 질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시간 정도로 한정된 시간동안 시시콜콜 지난 정책과 앞으로의 정책을 다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질문보다 더 상위 개념의 질문이 많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한 질문들이 TV방송 시 적극 반영되길 바란다.

정치인은 사실 모든 정책에 문외한이다. 이들은 단지 어떠한 길을 갈까하고 목적과 목표를 설정할 뿐이지.. 정책이 실현되기 위한 수많은 각종 문제들, 갈등들, 오류들을 인지해낼 전문적 지식은 없다. 이런 비전문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정책에 대한 정치이념, 철학, 그리고 청렴함이다.

가끔 청문회에서 스폿라이트를 받는 국회의원들 보면 꼴 사납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슨 특정 분야 정책협의회의 때나 해야할 질문들(예를 들어 우포 늪지에 두꺼비를 위한 생태통로가 없다는 식의 질문 혹은 타박)을 같은 정치인인 장관을 앞에 세워두고 윽박지른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비웃음부터 나온다. 국회의원도 비전문가고, 장관도 비전문가다. 그들이 나누는 질문과 답변 속에 과연 그들이 진정 이해하며 질문하고 답하는 걸까? 아마도 옆 보좌관들만 몇일 밤을 새며 질문할 자료와 답변할 자료 만드느라 힘들 뿐일게다.

정치인에게 정책의 세세한 부분을 묻는 건 우문이라 생각된다. 그들에게 들어야할 이야기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 국민을 위해 어떤 이념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청렴한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가끔 정치인(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등)에게 전문가만큼의 지식을 요구하곤 하는데.. 이는 잘못된 바램이고 이러한 잘못된 바램으로 인해 정치인들을 더 삐뚫게 보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대략 한달전 프랑스의 대통령에 대한 방송프로그램을 본 게 기억난다. 대통령이란 모든 지 잘 알고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가 나아갈 길을 깊은 통찰력과 정치이념, 각계 인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국민에게 밝히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번 국민과의 대화 "KBS 1TV - 대통령과의 대화 질문있습니다!"에서도 이를 집중적으로 다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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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위키백과


약력

어린 시절

이명박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12월에 현재 일본의 오사카 시 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오사카 부(大阪府) 나카카와치 군(中河內郡) 가미무라(加美村)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4]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환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왔다.[5]

학창 시절

당초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설득으로,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닌다는 약속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졸업하였다.[6][7] 그 후 서울로 가서 1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독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입학, 아침 청소부 생활을 하며 학비를 조달하며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중 군에 입대하였으나, 훈련소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이후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8]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현대건설 시절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 비서진이 찾아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고 그는 현대건설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9]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9] 결국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파타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 당시 폭도들로부터 금고를 지킨 일화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한국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Gulf-War)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로 인해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10].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의원의 입당으로 정주영 가문과 화해하였다는 보도도 있다..[11]

정계 입문

이명박은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12][13] 그는 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다. “경선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해 경선을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 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7억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14]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15]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16]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17]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500㎞ 길이의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출발점인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9]

금융 사업

이명박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대한민국에서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다. 엘케이이뱅크라는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동업자였던 김경준과 그가 설립한 BBK의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어 검찰이 수사를 하였고 2007년 12월 6일 이명박이 BBK와 관련이 없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에 대통합민주신당민주노동당민변 등은 검찰 수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혐의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일명 BBK 특검법)을 12월 17일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이뤄졌다. [18][19] 하지만 BBK 특검팀은 2008년 2월 21일 수사결과 검찰에서와 같이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수사결과를 믿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20]

서울시장 시절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가운데).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가운데).

32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명박은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취임 직후 복원 작업에 착수,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상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을 위한 문화휴식공간, 관광명소로 변화시켰다.[21] [22]타임스는 복원된 청계천이 마치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도심의 흉물로 철거 대상이었던 청계고가는 이 당선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지적했다.[23] 하지만 자신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 물을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파괴 및 훼손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24][25]또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연간 69억6000만원(2005년10월 7일 서울시의회 청계천 유지비로 상정) 의 유지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26] [27] 청계천을 유지보수의 한계성때문에 새로 만들 경우 2조원의 돈이 든다.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문화재 개방의 기조아래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후 관리소홀로 인해 2008년 숭례문에 방화 사건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있다.

2004년 수도권 버스 개편, 티머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4년 7월 1일 이명박은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 때 신설된 교통카드티머니 교통카드다. 버스 중앙차로제를 실시하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고, 이용 요금은 교통카드의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적자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 회사들의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버스개편의 결과 버스의 통행 속도가 빨라졌고 대중교통 이용객도 증가하였다. 중앙버스차로제도 그에 의해 생겨났다. [28]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29]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도입 초기 혼란을 빚었다는 의혹과 준공영제 도입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보전하는 데에 수천억의 예산이 사용되는 것등으로 인한 비판도 있었다.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서울대공원의 근무인원을 관람객이 많은 주말과 휴일에 더 늘리고, 미술관 등의 관람시간도 직장인 퇴근시간 이후로 연장했다. 이 과정에서 “평일 관람시간을 늘리고, 주말 개장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박물관 좀 구경합시다. 주말에 가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돌려서 신호를 보냈고, 공무원들이 알아서 그 뜻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종교적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나 이 부분도 특검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30]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측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31]

2007년 대선

이명박은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루어 2위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한나라당의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32] 당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박근혜에게 모두 패했지만, 전화상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앞지름으로써 승리하였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가 '아름다운 승복'을 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7년 12월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후보였으며,[33], 2007년 12월 19일 각기 26%와 15%의 지지를 받은 대통합 민주신당 대표 정동영후보와 무소속 이회창후보를 제치고 49%의 지지를 받으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8년 2월 25일 공식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 이후

취임식

2008년 2월 25일의 취임식
2008년 2월 25일의 취임식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렘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이다. 태평소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희망의 울림소리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태평소는 음색이 매우 강하고 높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북은 가장 힘차고 박진감 넘치며 전진을 상징하는 악기라는 점에서 모티브로 채택했다고 한다.[34]

지지율 하락

2008년 4월 18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2008년 4월 18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투표자 중 과반수에 가까운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후 이명박은 불도저라는 자신의 이미지 대로 인재를 뽑고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명 고소영, 강부자라고 불리는 문제있는 인사들에 의한 내각이라는 비판 여야 및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50여개 품목 물가안정,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였으나 1970년대식 정부통제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한미FTA와 같은 현안들에 대해서도 이전 노무현 정부보다 친기업적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유가급등과 또한 강만수 장관이 주도하는 기획경제부의 환율정책으로 인한 환율상승등 대내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물가가 급상승하고 또한 한미FTA협상중 가장 민감한 현안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위한 협상과정에서 2008년 4월 18일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날때 제시한 조건에 대해 국내의 반발이 커져갔으며 촛불문화시위등 으로 번져 갔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경찰에 의한 강경진압등으로 인해 이명박의 지지율은 한때 최저 16%를 기록하였다. 재협상 시도후 6월말 현재에는 지지율 회복을 보였으나 다시금 강경진압과 고시강행을 통해 국정의 어려움은 더욱 더 커져가고 있다.[35]

주요 정책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 정부입니다.

비판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에 대한 비판입니다.

정치에 입문한 1993년부터 그는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비난을 받았다. 1996년에 이명박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선거비용을 속이고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켰음이 밝혀져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에 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가 서울시장에 재직하던 당시에도 여러가지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이명박 공짜 테니스 의혹 사건[36] 이 있으며, 그가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 대중교통 개편은 많은 호응을 받았고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으나 재정지출의 증가로 인한 비판도 일각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에 대한 주요한 비판은 그가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에 나타났다. 한나라당 경선 상대였던 박근혜대통합민주신당 등 경쟁 정당들이 뉴타운 의혹,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 소유 빌딩 지하업소의 성매매[37]등 여러 의혹을 제기하였고 그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BBK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그의 대선 행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까지 거론되기도 하였다.

BBK 주가 조작 사건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경준이 선거에 즈음하여 귀국함에 따라 이에 대한 검찰수사가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김경준이 귀국하며 가져온 이면계약서등 이명박이 BBK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검찰의 수사결과 이것은 위조된 것이고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무혐의로 밝혀졌다. 하지만 정치권의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정동영을 비롯한 당시 대선후보들과 대통합민주신당등의 주장을 이명박이 받아들여 BBK사건 뿐만아니라 차명재산, 서울시장 시절의 특혜의혹등에 대한 이명박 특검법이 입안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뤄졌다. 2008년 2월 21일 발표된 특검의 수사결과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은 무혐의[38]로 밝혀지면서 BBK와 특혜의혹등은 일단락되었다. [39]

또한 주요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하여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것을 시사하는 정부 관련자의 발언과 이에 대한 각계의 반발로 많은 논란과 비판이 일고있다. [40] [41] [42]

최근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몰입교육을 검토하다 진중권 등 일부 진보운동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43] 또한 2008년 2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해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 숭례문 주변을 개방한 이유로 책임론이 부각되었으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불분명하여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무회의 구성을 위해서 15인의 국무의원 후보자를 지명하였으나 그 중 3인이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자녀의 국적 문제등으로 인해서 자진사퇴를 하였으며, 인선과정에서 능력주의 실용인사 코드를 주장하였으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맥으로 채워진 편중인사라는 지적이 있었다.

임기 100일이 지난 2008년 6월, 이명박의 국정 지지율은 10~20% 대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2008년 5월 2일 이후의 촛불시위 이후 조사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7.4%의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7월의 G8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후쿠다총리와 한 독도 영유권 관련 발언을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하여 진위여부에 따른 논란이 일고 있다.

프로필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5살때까지 일본에서 자랐다.

학력

경력

상훈

  • 1982년 체육훈장 백마장·거상장
  •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 1985년 금탑산업훈장
  •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 1999년 20세기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저서

가족 관계

1970년 김윤옥과 결혼했으며, 이주연(1971년 ~ ), 이승연(1973년 ~ ), 이수연(1975년 ~ ), 이시형(1978년 ~ )의 네 자녀를 낳았다. BBK 의혹 관련하여 제기된 주식회사 다스의 대주주인 이상은은 이명박의 맏형이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은 둘째형이다.

혼맥

첫째 사위는 삼성화재의 상무이며 한국타이어의 조양래 회장과 사돈을 맺어 셋째 사위가 한국타이어의 부사장 조현범이다. 둘째 형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쪽으로 큰조카는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대표이며 조카딸은 LG그룹명예회장 구자경의 동생 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장남과 결혼하여 사돈 관계이다.[44]


더 보기

주석

  1. 이명박 “군대 가고 싶었지만 병때문에 훈련소서 퇴출당해””, 《동아일보》, (2007년 7월 20일).
  2. 이명박 선친의 성은 '쓰키야마(月山)'였다”, 《한국일보》, (2007년 7월 20일).
  3. ㆍ햇볕정책 비판
  4. 〈스페셜 리포트〉 이명박 후보, 오사카 출생지를 확인하다”, 《일간스포츠》, (2007년 12월 7일).
  5. 출생지에 관한 언급은 1995년에 출간된 자서전(《신화는 없다》. 이명박. 김영사, 1995.)에도 수록되어 있다.
  6.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넘어 청와대 주인 되다.”, 《세계일보》, (2007년 12월 19일).
  7. 〈선택 2007〉 이명박”, 《한국일보》, (2006년 12월 31일).
  8. 〈그때 그 사건〉‘빈둥 발언’은 자아비판인가”, 《뉴스메이커》, (2007년 3월 13일).
  9. 9.0 9.1 9.2 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경향신문》, 2007년 12월 19일.
  10. 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한겨레21》, 2007년 7월 26일
  11. 이명박-현대家, 앙금 풀어지나? , 《이투데이》, 2007년 12월 20일
  12. 공시지가 보다도 낮아 “아연”/김영광·이명박·김문기의원, 《한겨레》, 1993년 3월 23일.
  13. 이명박의원 150억대 땅은닉/도곡동“금싸라기 땅”…현대사장때 매입, 《세계일보》, 1993년 3월 27일.
  14. 선거 자금 폭로 파문/김유찬씨 일문일답·이명박 의원 일문일답”, 《경향신문》, (1996년 9월 11일).
  15. 이명박 의원 참모 2명 구속/선거비폭로 사건”, 《조선일보》, (1996년 9월 23일).
  16. “이명박 의원 어쩌자고…”/전격 서울시장 출마선언”, 《동아일보》, (1998년 2월 5일).
  17. 이명박씨 “시장경선 불참””, 《국민일보》, (1998년 4월 29일).
  18. 민변 “BBK 수사 공정성 의심…전면 재수사를””, 《한겨레》, (2007년 12월 13일).
  19. 절반 이상 “BBK, 안 믿는다””, 《KBS》, (2007년 12월 8일).
  20. 李 의혹 `모두 무혐의'.."도곡동 땅 이상은씨 소유"연합뉴스, 2008년 2월 21일
  21. <이명박 `노점상 소년서 대통령까지'>-3. '따뜻한 불도저' 시장, 《연합뉴스 TV》, 2007년 12월 20일.
  22. [1]한겨례 지자체 묻지마식 청계천 따라하기, 2008년 6월 27일
  23. “불도저라 불린 사나이, 청계천으로 대통령 되다”- NYT, 《뉴시스》, 2007년 12월 20일.
  24. 복원 다섯달, 청계천에 물이 '줄줄' 샌다,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6일.
  25. 개통된지 얼마됐다고…청계천 벽면 곳곳 균열, 《세계일보》, 2005년 12월 2일.
  26. 청계천, ‘물 값+전기료+관리비’ 등으로 혈세 ‘줄줄’, 《업코리아》, 2006년 11월 20일.
  27. [2],《오마이뉴스》, 2007년 8월 16일.
  28. 서울 시내버스 최고 2배 빨라졌다..대중교통 체계 개편이후 , 《한국경제신문》, 2007년 10월.
  29. Heroes of the Environment, 《타임》, 2007년 10월.
  30. 국제금융센터, AIG는 계약때부터 매각 계획, 《KBS》, 2007년 8월 21일.
  31. 박근혜 캠프 "이명박, 서울시 부채 5조 더 늘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3일).
  32.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명박 확정, 《연합뉴스》, 2007년 8월 20일.
  33. 이명박 43.9% · 이회창 17.5% · 정동영16.1% - 《조선일보》, 2007년 12월 7일.
  34. ‘섬기는 정부’ ‘실용정부’ 의지 행사장 곳곳에 반영”, 《한겨례》, (2008년 2월 25일).
  35. [3] 한겨레 대통령 지지율 좀 올랐다고 촛불 강경대응, 2008년 6월 27일
  36. 이명박 시장, '별장 파티' 의혹”, 《MBN》, (2006년 4월 17일).
  37. 李대통령 소유 빌딩, 여성접대부 영업 계속”, 《고뉴스》, (2008년 5월 3일).
  38. BBK 고소취하 온풍 불까”, 《내일신문》, (2008년 4월 25일).
  39. ‘꼬리곰탕 특검’ … 3만2000원짜리 정식 들며 조사”, 《중앙일보》, (2008년 2월 19일).
  40. 강만수, 대운하 '블도저식 강행' 선언”, 《뷰스앤뉴스》, (2008년 3월 1일).
  41. 학계, 대운하 반대에 나섰다”, 《이투데이》, (2008년 3월 14일).
  42. 바다·땅·교통 관할…대운하 ‘꼭 한다’ - 국토해양부”, 《한국경제신문》, (2008년 3월 12일).
  43. "오로지 영어만 몰입? 한마디로 미쳤다!!"”, 《브레이크뉴스》, (2008년 2월 12일).
  44. [4] 이명박 ‘5대 경제인맥’ 살펴보니… , 조선일보 2007년 12월 20일


이명박.. 청와대 홈피




이명박 대통령 사진
이 명 박 李明博 Lee  Myung-Bak 1941.12.19 ~
  • 생년월일 1941.12.19 (양력)
  • 본적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537
  • 본관 경주
  • 종교 기독교
  • 혈액형 B형
  • 자녀 1남 3녀
  • 신장/체중/시력 173cm / 70kg / 좌 1.0 우 1.0
  • 존경인물 안창호, 간디, 잭 웰치
  •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 가훈 정직
  • 취미 테니스, 수영
  • 결혼일 1970.12.19
  •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 아침이슬(양희은)
  •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보아, 비
  •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 장동건
  • 감명깊은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캐스트 어웨이, 벤허

학력사항

  • 1954 포항 영흥초등학교 졸업
  • 1957 포항중학교 졸업
  • 1960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 1965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98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
  • 2004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 2004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 2005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2005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경력사항

  • 1965 현대건설 입사 (공채)
  • 1977~19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 1978~1981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78 한국도시개발(現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78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 1980 해외건설협회 업계대표 부회장
  • _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업계대표 부회장
  • 1981~1992 대한수영연맹 회장
  • _ 대한알루미늄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
  • 1982~1987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82~1992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 _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 _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 1983~1992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 1983~1992 해외건설협회 이사
  • 1983~1990 동남아 경제협력 건설분과 위원장
  • 1984~1992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 1984 세계수영연맹 집행위원
  • 1985~1986 한라건설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6~1999 주한부탄왕국 명예총영사
  • 1987~1992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8~1992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 1988~1992 현대엔진공업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8 한무쇼핑(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9~1992 한·소 경제협회 설립준비위원장 겸 부회장
  • 1989~1991 현대종합목재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90~1992 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회장 겸임
  • _ 한국항만협회 이사
  • 1991~1992 동북아 경제협력 민간협회 한국측 회장
  • 1992~19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이후 신한국당, 전국구)
  • 1992~1994 6.3동지회 회장
  • 1992~2007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 1993~1996 한국청년실업인협의회 회장
  • 1993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 겸 운영이사회장
  • 1994~2002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 1995 삼청로터리클럽 회장
  • 1996~1998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 서울 종로)
  • 1996 한국국악협회 고문
  • 1997 한나라당 종로지구당위원장
  • 1999~2002 아태 환경NGO 한국본부 총재
  • 2000~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 2000~2002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 2001~2007 해외한인무역협회 고문
  • 2001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 위원장
  • 2002~2006 서울특별시장(32대, 민선3기)
  • _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 2005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사 fDi 선정 2005 올해의 인물
  • 2007 한나라당 제 17대 대통령후보
  • 2008 제17대 대통령 취임

저서

신화는 없다 /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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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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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을 민영화하려는 진짜 이유는?

2008년 8월 19일(화) 오후 7:25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3년 연속 세계공항서비스 평가 1위, 당기순이익 2701억원(2007년) 등을 기록했던 인천공항이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 1단계'에 포함됐을 때 "수상하다"는 눈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이명박 정부가 인천공항의 지분 49%를 매각함으로써 민영화하려는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18일 발행된 <한겨레21>과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부가 인천공항공사 지분을 매각하면 인수에 나설 '0순위'로 꼽히는 맥쿼리그룹이 이명박 대통령의 지인·친척 등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밝혔다.

'수상한' 인천공항 민영화와 관련, 현오석 고려대 겸임교수-송경순 LECG 한국 대표-이명박 대통령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 한겨레21





인천공항이 14개 공공기관 평가서 12위 기록한 까닭

맥쿼리그룹은 민영화한 시드니공항에 투자한 오스트레일리아계 투자은행이다. 특히 이 그룹은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에도 투자했고, 정부가 인천공항의 지분을 매각하면 가장 먼저 인수에 나설 기업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민영화된 시드니(맥쿼리)공항은 공항주차료를 올리고 무료 셔틀버스를 유료화해 수익을 올리고 있어 맥쿼리그룹이 인천공항의 지분을 인수할 경우 시드니공항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07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인천공항은 14개 공기업 중에서 12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매출 9714억원, 영업이익 4606억원, 당기순이익 2701억원 등 '실적'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낮은 평가를 받은 것.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조차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의 질의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납득할 만한 평가가 아니다"라고 답변했을 정도다.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은 "인천공항민영화를 맥쿼리에 넘기기 위해 고의적으로 인천공항의 경영평가를 낮게 매겼을지 모른다"며 "인천공항 민영화는 호주계 외국투자자본인 맥쿼리 자본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기획되고 진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공공기관 평가단장을 맡은 현오석 고려대 겸임교수와 송경순 LECG(컨설팅업체) 한국 대표, 이명박 대통령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먼저 현오석 교수는 정부 산하 공기업선진화추진위원회·국제개발협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 교수가 인천경제구역위원회 위원인데, 인천공항 지분 인수가 유력한 맥쿼리그룹이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지난 2001년 3월29일 인천국제공항 개항 첫날.

ⓒ 이종호




<한겨레21>은 "현오석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국제개발협력위원회의 동료위원 중 송경순 대표가 있는데 송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라며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1990년대 말 이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 있을 때 송 대표의 집에서 한달에 한번씩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 당시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위해 보험그룹 AIG의 외자를 유치하려 애쓰고 있을 때 송 대표가 AIG쪽과 협상을 주도한 일도 있다."

더욱 주목되는 사실은 송 대표가 '맥쿼리 인프라 펀드'의 감독이사라는 점이다. 맥쿼리그룹 계열인 맥쿼리 인프라 펀드는 주로 공항·항만·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금융자본으로 현재 인천공항고속도로에도 투자하고 있다.

홍희덕 의원은 "맥쿼리 인프라 펀드에 다른 감독이사로 있는 조대연 이사는 현오석 교수와 경기고 65회 동창"이라며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는 핵심인물인 현 교수와 인천공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맥쿼리 인프라 펀드의 감독이사 2명이 모두 가까운 사이"라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명박 조카 지형씨, 맥쿼리 계열사 대표 지내

또 이명박 대통령의 조카이자 이상득 의원의 장남인 이지형씨가 맥쿼리그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골드만삭스는 투자전문기관인 맥쿼리IMM 자산운용을 인수했다. 당시 맥쿼리IMM 자산운용의 대표가 이씨였다. 이후 골드만삭스는 이씨를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대표로 앉혔다. 골드만삭스는 '골드만삭스-맥쿼리 인프라 재간접 펀드'라는 사회간접자본 투자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홍 의원은 "사회간접자본 투자펀드란 공항, 도로, 항만 등에 투자하는 펀드"라며 "이명박 정부가 인천공항 민영화를 강하게 붙어붙이는 것에 의심을 살만한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의 회계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투시와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맥쿼리IMM 자산운용을 거쳐 지난해 골드막삭스 자산운용 대표를 맡았다. 

이씨는 지난 5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골드만삭스가) 업무 연속성을 고려한 것 아니겠느냐"며 "그동안 대형 기관투자가·판매사와 쌓아온 관계가 채권형 펀드 등에서 낸 실적도 감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대선 이후 이런 저런 청탁은 없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게 부탁하는 사람은 없다"며 "이 바닥에 그럴 여지가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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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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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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