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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을 사용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 중에 하나가 음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제사 알게된 사실이지만.. iOS 8 부터 지원했다는 것. ㅡㅡ;;

(늘 느끼는 거지만, 소소한 변화를 감지 못하면 남들보다 조금 불편합니다. ^^)


암튼, 이제라도 알게된 사실로 인해.. 가족, 친지, 지인들 중 음력으로 생일을 챙겨야 할 분들은 하나둘 입력해 봅니다. ^^

이런 일을 계기로 또한번 지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ㅎㅎ


일단, 주소록을 엽니다.

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다산콜센터 활용합니다.  ^^;;


기본적으로 생일 추가를 하면 양력 생일입니다. 편집을 누르고,

생일 아래 "생일 추가"를 터치합니다.


자동으로 중국력 생일 이라는 항목이 생기고, 양력 생일 날짜와 자동변환되어 한자로 보여줍니다.

완료를 터치하면 끝~. 인줄 알았는데.. 더 찾아보니 우리나라 음력과 중국력은 차이가 있네요.

(위키백과 - 태음태양력, 한국과 중국, 베트남은 같은 원리의 태음태양력을 사용하지만 자오선이 다르기 때문에 설날이 다른 날에 올 수 있다. 1914년부터 2099년 사이의 200년 동안 중국과 한국의 설날이 하루 차이가 나는 날은 15번이 된다.)


개인의 생일을 하루이틀 잠시 틀리는 것이야, 보통 생일을 미리 축하하니 그닥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으나, 제사나 시제 등을 챙기는데 활용해서는 안될 거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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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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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위키백과


생애

[편집] 어린 시절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에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1963년경남 김해의 진영중학교를,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전방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동향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양숙1973년 결혼해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편집]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딩기)[2]를 즐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3]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구속되었고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편집] 정치 입문

재야 활동을 하던 노무현은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편집] 정치 활동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4] 그리고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한 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듬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대한민국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노무현은 이부영, 박계동 의원과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1997년 11월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5]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노무현은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2000년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편집]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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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지방선거(6•13)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를 하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 지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이상 가나다순)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를 차례였는데, 이변은 바로 그 광주 땅에서 시작된다. 부산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당당히 득표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과 함께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노무현은 당시 광주 1위를 기록한 다음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노풍: 盧風),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경선 끝자락이었던 경기 경선에서는 정동영이 1위 차지.)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 세력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빌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민주당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와 김홍걸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 시장을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후보로 내세움.)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에 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에서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평소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 정풍(鄭風)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 민주당에 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이하 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용학(새천년 민주당 대변인 등 당직 역임)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 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 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여론조사1: 노무현 승리, 여론조사2: 무효-이회창 지지율 낮음, 역선택 의심)

후보 단일화에서 낙마한 정몽준 전 후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유세를 나서는데 망설여 단 한차례의 유세를 나가는데 그쳤고, 선거 전날 저녁에는 급기야 후보단일화를 철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1년 전 지지율 한자릿수에 그쳤던 노무현이 일국의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어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참여정부의 신호탄을 쏘았다.

[편집] 대통령직 수행

[편집]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2004년 2월 24일)

2003년 5월 14일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5월 14일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 참여정부 출범.[6]

2003년 2월 26일: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 국회 통과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조각 발표, 새 내각 출범.

2003년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대통령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 이 함께하는 토론.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지적해 한때 유행어가 됐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2003년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터지듯 쏟아져나오자,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총련의 저지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건이 이 발언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03년 10월 10일: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등 거대야당의 국정
발목잡기가 극에 달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그 밖에도, 취임 1년차에는 2003년 2월 25일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5월 15일 조지 W. 부시와 정상회담을 하였다. [7] [8]

[편집]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2005년 2월 24일)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9] 탄핵안 가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권한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2004년 4월 15일: 대통령이 당적을 두고 있는 여당 열린우리당이 4·15 총선에서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10]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그에 준하는 국민투표를 통하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었다.

[편집]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2006년 2월 24일)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특별법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편집]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2007년 2월 24일)

2006년 11월 18일에 권양숙과 노무현이  APEC에서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2006년 11월 18일권양숙과 노무현이 APEC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를 만났다.

2007년 1월 9일 : 노무현 대통령이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개정을 하겠다는것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2007년 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색다른 표현을 썼다. 종래 대통령의 임기말 탈당이 대선을 앞둔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등떠밀리듯 이뤄진 것에 비해, 자신의 탈당은 개헌 등의 상황에 따른 자발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편집]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2007년 6월 8일 : 노무현 대통령이 6월 2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을 비하하는 내용을 발언하였으며, 이에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선거법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중립의무라는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2007년 10월 4일 :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관계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11][12][13]

[편집] 퇴임후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을 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봉하마을에 대한 관심이 또한 누리꾼의 화제가 되었다.[14]

임기중에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봉하마을에는 그를 보기 위한 관광객이 몰려드는 등 인기가 없던 임기중과는 달리 퇴임후에 오히려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퇴임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터넷에 오른 한 사진이 기화점이 되었는데, 그 사진에서 노무현은 동네 매점에서 사복 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편,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에서 국가기록물 유출 건에 대하여 노 전 대통령을 압박한 바 있다.

[편집] 외교정책

노무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외국을 가장 많이 순방한 대통령이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로마교황청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15] [16]

[편집] 미국

2005년 11월 18일에 부시 대통령과 부산에서 만났다.
2005년 11월 18일부시 대통령과 부산에서 만났다.
2003년 10월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3년 10월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과 부시가  APEC에서 만났다.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과 부시가 APEC에서 만났다.
2006년 9월 14일의 백악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2006년 9월 14일백악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생각되어졌는데 2002년 대선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취임 후 그의 부담이 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좌익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독자노선을 걸은 흔적은 크게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미국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미국 친화적인 모습이 많았다.

이런 정책 때문에 민주노동당 등 한국의 좌파 정치세력들은 노무현 정권을 친미정권이라고 비판한다.[출처 필요]

최근에는 미국에 지나치게 '퍼주기'식으로 일관한다고 비판을 받은 이명박 현 대통령에 비해 비교적 실리를 챙긴 대미 외교 정책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출처 필요]

[편집]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전범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언론과 야당으로 부터는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대북유화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의 노무현 대통령
2006년의 노무현 대통령

2006년 일본의 일본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 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2006년 11월 에이펙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총리와의 양자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제안과 관련된 파문이 커지자 이를 처음 보도한 '세계일보'에 전적으로 책임을 돌렸다.

[편집] 주요 정책

  • 노무현 정부의 주요 정책은 크게 12개의 국정 과제로 제시됐다.
이 부분의 본문은 참여정부입니다.

[편집] 유행어

  • TV토론 등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발언을 하여, 이 발언이 대통령 취임 초기 한동안 유행하였다. 당시 KBS개그콘서트의 개그맨 김상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를 흉내냈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이 유행어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맞습니다맞고요’라는 한글 주소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결된다. [17]
  • 일부 보수언론의 대통령 탓하기에 질린 네티즌 사이에서 그와 전혀 무관한 인터넷 기사 리플(덧글)란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 전직 국방부 장관 등의 군 인사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말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발언이 플래시, UCC 등으로 편집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심지어 연설 내용을 리믹스해 랩으로 만든 UCC도 있었다.
  • 참여정부 시기, 삼성의 경제적 비중이 확대되고, 삼성의 전방위 로비활동이 일부 드러나면서 '삼성공화국' 이란 말이 유행했다.

[편집] 수상 경력

[편집] 함께 읽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추광규. “노무현, 새로운 애칭 생겼다....'노공이산'”, 《오마이뉴스》.
  2. 딩기란, 무동력선이며 엔진과 선실을 갖추지 않은 1-3인용 요트로 바람의 힘으로만 갈 수 있다. 주로 스포츠 운동에 사용. 일부 비판자들이 이를 호화요트라고 비난하였지만, 선실과 엔진을 갖춘 크루저(호화요트)와는 다르다.
  3.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고 하였다.
  4. 여소야대 몰리니까 지역구도 해체?
  5.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이회창과 연대를 결정하여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의 선택을 놓고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여러분과 같이 일하게 된 것은 기쁨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동안 지고 있던 짐을 덜게 된 기분"이라는 말로 사과를 대신했다.
  6.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연설
  7. 권경복 기자. “[韓·美 공동성명] 한국 ‘군사조치’로 해석될까 반대 ”, 《chosun.com》, 《조선일보》, (2003년 5월 16일). 2008년 5월 27일에 읽어봄.
  8. 신정록 기자. “[韓·日정상회담] 고이즈미 “북한과 대화하겠다””, 《chosun.com》, 《조선일보》, (2003년 2월 25일).
  9.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10.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
  11. 2007년 남북 정상 회담 관련 뉴스
  12. 해럴드 경제 2007년 9월 31일자
  13. 아시아 경제 2007년 10월 3일자
  14. 노무현 대통령 귀농..
  15. 盧대통령 해외순방 23차례 49개국 역대 최다 노대통령 유럽 3개국 순방 의미
  16. 盧대통령 해외순방 역대 최다…23차례 49개국 방문
  17. '맞습니다 맞고요' 청와대 기증, 《매일경제》, 2003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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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바깥 고리



노무현 - 위키백과


  • 1946. 8. 6(음력) 출생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
  • 1959. 김해 진영 대창초등학교 졸업
  • 1960. ‘우리 대통령 이승만’ 작문에 항의 백지동맹 주도
  • 1963. 김해 진영중학교 졸업
  • 1966.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53회)
  • 1968. 3. 8. 육군 입대
  • 1971. 육군 상병 만기제대 (을지부대)
  • 1973. 권양숙 여사와 결혼
  • 1975. 3. 제17회 사법고시 합격
  • 1977. 대전지방법원 판사 재직
  • 1978. 5. 5. 변호사 개업 (現 법무법인 부산)
  • 1981. 1. 22 부산일보 생활법률상담 연재 (1981. 1. 22. ~ 1982. 6. 15)
        (미 문화원 방화사건 변론 후 법률상담 연재 중지)
  • 1982. 6. 15. 미 문화원 사건 첫 공판
  • 1984. 부산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 1985. 부산 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 1987. 2. 10.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가담 후 연행 (총 798명 연행)
  • 1987. 2. 12. 4차례 구속신청 진상 조사
        - 노무현 변호사 4차례 연속 구속영장신청에 대한 대한변협과 부산변협 진상 조사
  • 1987. 2. 13. ‘2. 7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관련 구속자 인권유린 관련 조사
  • 1987. 6.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
  • 1987. 9. 대우조선 분규 관련 구속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
  • 1988. 4. 28. 제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부산동구) 당선
  • 1988. 6. 15. 변호사 업무 정지 해제
  • 1988. 6. 부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결성 참여
  • 1988. 12. 31. 5공 청문회 (전두환 증인에 대한 청문회 - 명패사건)
  • 1990. 3. 3. 3당야합 규탄 및 민주당 창당 지지대회
  • 1991. 9. 16. 신민, 민주 야권통합 (통합협상 대표)
  • 1991. 9. 17. 통합민주당 대변인
  • 1992. 3. 24. 제14대 총선 (민주당, 부산동구) 낙선
  • 1992. 11. 제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물결유세단 단장
  • 1993. 3. 11. 민주당 전당대회 (최연소 최고위원 당선)
  • 1994. 10. <여보 나 좀 도와줘> 출판
  • 1995. 2. 선거 조직관리 S/W ‘리더메이커’ 개발
  • 1995. 2. 24. 민주당 임시전당대회 (민주당 부총재 선출)
  • 1995. 5. 9.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경선 출마 선언
  • 1995. 5. 12.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 선출 (부산시당 전당대회)
  • 1995. 6. 27. 부산시장 선거 낙선
  • 1996. 1. 19. 종로 출마 관련 기자간담회
  • 1996. 4. 11. 제15대 총선 출마 (민주당, 서울종로) 낙선
  • 1996. 11. 10. 국민통합추진회의 창립대회
  • 1997. 3. 7. 하로동선 음식점 개업
  • 1997. 9. 3. S/W ‘우리들3.0’ 개발
  • 1997. 9. 25.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 수필집 공저
  • 1997. 11. 13.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기자회견 (부총재)
  • 1997. 11. 26. 제15대 대선 수도권 특별유세단 (파랑새유세단) 단장
  • 1998. 7. 21.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서울종로) 당선
  • 1999. 2. 9. 제16대 총선 부산, 경남지역 출마 기자회견
  • 2000. 1. 25. 새천년민주당 지도위원
  • 2000. 4. 13. 제16대 총선 (부산 북구 강서 을) 낙선
  • 2000. 5. 24. 대선출마 공식선언 기자간담회
  • 2000. 6.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노사모) 창립총회
  • 2000. 8. 7.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
  • 2001. 7. 20. ‘자치경영연구원’ 부산본부 설립
  • 2001. 12. 10.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 및 후원회 / 대선출마 공식선언
  • 2002. 1. 17. 노무현과 네티즌의 만남
  • 2002. 3. 9. ~ 2002. 4. 27. 민주당 국민경선 / 대통령 후보 선출
  • 2002. 10. 20. 개혁국민정당 발기인 대회
  • 2002. 11. 3. 서울 국참 발대식 / 후보단일화 방침 발표
  • 2002. 11. 25. 후보단일화 확정
  • 2002. 12. 19. 제16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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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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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위키백과


약력

어린 시절

이명박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12월에 현재 일본의 오사카 시 히라노 구에 해당하는 오사카 부(大阪府) 나카카와치 군(中河內郡) 가미무라(加美村)의 조선인 정착 지역에서[4]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귀환하여 경북 포항으로 이사왔다.[5]

학창 시절

당초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담임의 설득으로, 등록금이 면제되는 동안만 다닌다는 약속하에 동지상고 야간부에 입학하여, 3년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아 졸업하였다.[6][7] 그 후 서울로 가서 1년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독학을 하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입학, 아침 청소부 생활을 하며 학비를 조달하며 졸업하였다. 대학교 2학년 재학중 군에 입대하였으나, 훈련소에서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3학년 때에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다음 해인 1964년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해 6.3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수배되었고, 이후 자수하여 계엄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8]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현대건설 시절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 비서진이 찾아와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고 그는 현대건설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9] 그는 면접에서 “건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9] 결국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한다.

입사 1년차 때 태국의 파타니와 말레이시아 국경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 공사 당시 폭도들로부터 금고를 지킨 일화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입사 12년만인 1977년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피낭 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진행하였고, 사우디 아라비아로부터 수주했던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였던 주베일 항만공사의 성공으로 한국에 큰 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막대한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고, 또한 1990년~1991년 이라크-쿠웨이트 전쟁(Gulf-War)으로 인하여 미수 채권의 회수가 어려워져 이로 인해 퇴임 9년 뒤인 2001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10].

1992년 대선 시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회장의 출마와는 반대로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해 현대 정주영 일가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몽준의원의 입당으로 정주영 가문과 화해하였다는 보도도 있다..[11]

정계 입문

이명박은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의 아파트 소유권 이전 및 부동산 가격의 불성실 신고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12][13] 그는 95년 지방선거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와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쟁을 벌였다. “경선은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주장해 경선을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패했다.

그 후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7억원 가량의 선거비용을 누락하고 7천만원 정도의 비용만을 신고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14] 뒤이어 이명박 후보의 참모들이 김유찬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15] 이명박 후보는 재판을 받는 와중에 스스로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98년 3월, 주성영 검사에게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서울고등법원에서 40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던[16] 이명박 후보는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해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보아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17]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부산~미국 LA 간의 해상운송비보다 높다”고 지적하며 500㎞ 길이의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의 출발점인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9]

금융 사업

이명박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대한민국에서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다. 엘케이이뱅크라는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동업자였던 김경준과 그가 설립한 BBK의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있어 검찰이 수사를 하였고 2007년 12월 6일 이명박이 BBK와 관련이 없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에 대통합민주신당민주노동당민변 등은 검찰 수사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주가조작 등 범죄혐의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일명 BBK 특검법)을 12월 17일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에 따라 특별검사의 수사가 이뤄졌다. [18][19] 하지만 BBK 특검팀은 2008년 2월 21일 수사결과 검찰에서와 같이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수사결과를 믿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20]

서울시장 시절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가운데).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현장을 둘러보는 이명박(가운데).

32대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명박은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취임 직후 복원 작업에 착수,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을 복원하였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상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을 위한 문화휴식공간, 관광명소로 변화시켰다.[21] [22]타임스는 복원된 청계천이 마치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한다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도심의 흉물로 철거 대상이었던 청계고가는 이 당선자 자신이 대표로 있던 회사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고 지적했다.[23] 하지만 자신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다. 복원과정에서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상수도 물을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발견된 문화재들을 파괴 및 훼손하고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등 환경과 문화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부실공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다.[24][25]또한 당초 예상보다 많은 연간 69억6000만원(2005년10월 7일 서울시의회 청계천 유지비로 상정) 의 유지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26] [27] 청계천을 유지보수의 한계성때문에 새로 만들 경우 2조원의 돈이 든다.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문화재 개방의 기조아래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하지만 이후 관리소홀로 인해 2008년 숭례문에 방화 사건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있다.

2004년 수도권 버스 개편, 티머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04년 7월 1일 이명박은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 때 신설된 교통카드티머니 교통카드다. 버스 중앙차로제를 실시하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고, 이용 요금은 교통카드의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준공영제를 도입하여 적자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 회사들의 손해를 보전해주었다. 버스개편의 결과 버스의 통행 속도가 빨라졌고 대중교통 이용객도 증가하였다. 중앙버스차로제도 그에 의해 생겨났다. [28] 2007년, 타임지는 청계천복원과 버스체계 개편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다.[29]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도입 초기 혼란을 빚었다는 의혹과 준공영제 도입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보전하는 데에 수천억의 예산이 사용되는 것등으로 인한 비판도 있었다.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서울대공원의 근무인원을 관람객이 많은 주말과 휴일에 더 늘리고, 미술관 등의 관람시간도 직장인 퇴근시간 이후로 연장했다. 이 과정에서 “평일 관람시간을 늘리고, 주말 개장을 하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저녁에 박물관 좀 구경합시다. 주말에 가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돌려서 신호를 보냈고, 공무원들이 알아서 그 뜻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종교적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나 이 부분도 특검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30]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측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31]

2007년 대선

이명박은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루어 2위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한나라당의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32] 당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박근혜에게 모두 패했지만, 전화상 1표를 실제의 5표로 환산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앞지름으로써 승리하였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가 '아름다운 승복'을 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2007년 12월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후보였으며,[33], 2007년 12월 19일 각기 26%와 15%의 지지를 받은 대통합 민주신당 대표 정동영후보와 무소속 이회창후보를 제치고 49%의 지지를 받으며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8년 2월 25일 공식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 이후

취임식

2008년 2월 25일의 취임식
2008년 2월 25일의 취임식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엠블렘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이다. 태평소을 모티브로 삼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희망의 울림소리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태평소는 음색이 매우 강하고 높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두루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북은 가장 힘차고 박진감 넘치며 전진을 상징하는 악기라는 점에서 모티브로 채택했다고 한다.[34]

지지율 하락

2008년 4월 18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2008년 4월 18일에 이명박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났다.

투표자 중 과반수에 가까운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후 이명박은 불도저라는 자신의 이미지 대로 인재를 뽑고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명 고소영, 강부자라고 불리는 문제있는 인사들에 의한 내각이라는 비판 여야 및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50여개 품목 물가안정, 일찍 출근하고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였으나 1970년대식 정부통제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한미FTA와 같은 현안들에 대해서도 이전 노무현 정부보다 친기업적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유가급등과 또한 강만수 장관이 주도하는 기획경제부의 환율정책으로 인한 환율상승등 대내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물가가 급상승하고 또한 한미FTA협상중 가장 민감한 현안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를 위한 협상과정에서 2008년 4월 18일캠프 데이비드를 방문해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만날때 제시한 조건에 대해 국내의 반발이 커져갔으며 촛불문화시위등 으로 번져 갔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경찰에 의한 강경진압등으로 인해 이명박의 지지율은 한때 최저 16%를 기록하였다. 재협상 시도후 6월말 현재에는 지지율 회복을 보였으나 다시금 강경진압과 고시강행을 통해 국정의 어려움은 더욱 더 커져가고 있다.[35]

주요 정책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 정부입니다.

비판

이 부분의 본문은 이명박에 대한 비판입니다.

정치에 입문한 1993년부터 그는 불성실한 재산공개로 비난을 받았다. 1996년에 이명박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선거비용을 속이고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켰음이 밝혀져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에 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그가 서울시장에 재직하던 당시에도 여러가지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이명박 공짜 테니스 의혹 사건[36] 이 있으며, 그가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 대중교통 개편은 많은 호응을 받았고 세계적인 모델이 되었으나 재정지출의 증가로 인한 비판도 일각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에 대한 주요한 비판은 그가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후에 나타났다. 한나라당 경선 상대였던 박근혜대통합민주신당 등 경쟁 정당들이 뉴타운 의혹,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을 통한 탈세 , 소유 빌딩 지하업소의 성매매[37]등 여러 의혹을 제기하였고 그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었으며, BBK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은 그의 대선 행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까지 거론되기도 하였다.

BBK 주가 조작 사건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경준이 선거에 즈음하여 귀국함에 따라 이에 대한 검찰수사가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김경준이 귀국하며 가져온 이면계약서등 이명박이 BBK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검찰의 수사결과 이것은 위조된 것이고 이명박이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어 무혐의로 밝혀졌다. 하지만 정치권의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정동영을 비롯한 당시 대선후보들과 대통합민주신당등의 주장을 이명박이 받아들여 BBK사건 뿐만아니라 차명재산, 서울시장 시절의 특혜의혹등에 대한 이명박 특검법이 입안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뤄졌다. 2008년 2월 21일 발표된 특검의 수사결과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은 무혐의[38]로 밝혀지면서 BBK와 특혜의혹등은 일단락되었다. [39]

또한 주요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와 관련하여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행할 것을 시사하는 정부 관련자의 발언과 이에 대한 각계의 반발로 많은 논란과 비판이 일고있다. [40] [41] [42]

최근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몰입교육을 검토하다 진중권 등 일부 진보운동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43] 또한 2008년 2월 10일에서 11일 사이에 일어난 숭례문 화재와 관련해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 숭례문 주변을 개방한 이유로 책임론이 부각되었으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불분명하여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무회의 구성을 위해서 15인의 국무의원 후보자를 지명하였으나 그 중 3인이 부동산 투기, 논문표절, 자녀의 국적 문제등으로 인해서 자진사퇴를 하였으며, 인선과정에서 능력주의 실용인사 코드를 주장하였으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인맥으로 채워진 편중인사라는 지적이 있었다.

임기 100일이 지난 2008년 6월, 이명박의 국정 지지율은 10~20% 대에 머물러 있으며, 또한 2008년 5월 2일 이후의 촛불시위 이후 조사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7.4%의 최저치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7월의 G8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후쿠다총리와 한 독도 영유권 관련 발언을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하여 진위여부에 따른 논란이 일고 있다.

프로필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여 5살때까지 일본에서 자랐다.

학력

경력

상훈

  • 1982년 체육훈장 백마장·거상장
  •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 1985년 금탑산업훈장
  • 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
  •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 1999년 20세기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저서

가족 관계

1970년 김윤옥과 결혼했으며, 이주연(1971년 ~ ), 이승연(1973년 ~ ), 이수연(1975년 ~ ), 이시형(1978년 ~ )의 네 자녀를 낳았다. BBK 의혹 관련하여 제기된 주식회사 다스의 대주주인 이상은은 이명박의 맏형이고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은 둘째형이다.

혼맥

첫째 사위는 삼성화재의 상무이며 한국타이어의 조양래 회장과 사돈을 맺어 셋째 사위가 한국타이어의 부사장 조현범이다. 둘째 형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쪽으로 큰조카는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대표이며 조카딸은 LG그룹명예회장 구자경의 동생 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장남과 결혼하여 사돈 관계이다.[44]


더 보기

주석

  1. 이명박 “군대 가고 싶었지만 병때문에 훈련소서 퇴출당해””, 《동아일보》, (2007년 7월 20일).
  2. 이명박 선친의 성은 '쓰키야마(月山)'였다”, 《한국일보》, (2007년 7월 20일).
  3. ㆍ햇볕정책 비판
  4. 〈스페셜 리포트〉 이명박 후보, 오사카 출생지를 확인하다”, 《일간스포츠》, (2007년 12월 7일).
  5. 출생지에 관한 언급은 1995년에 출간된 자서전(《신화는 없다》. 이명박. 김영사, 1995.)에도 수록되어 있다.
  6.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넘어 청와대 주인 되다.”, 《세계일보》, (2007년 12월 19일).
  7. 〈선택 2007〉 이명박”, 《한국일보》, (2006년 12월 31일).
  8. 〈그때 그 사건〉‘빈둥 발언’은 자아비판인가”, 《뉴스메이커》, (2007년 3월 13일).
  9. 9.0 9.1 9.2 이명박, 가난·시련 떨친 ‘성공신화’ CEO형 리더십, 《경향신문》, 2007년 12월 19일.
  10. 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한겨레21》, 2007년 7월 26일
  11. 이명박-현대家, 앙금 풀어지나? , 《이투데이》, 2007년 12월 20일
  12. 공시지가 보다도 낮아 “아연”/김영광·이명박·김문기의원, 《한겨레》, 1993년 3월 23일.
  13. 이명박의원 150억대 땅은닉/도곡동“금싸라기 땅”…현대사장때 매입, 《세계일보》, 1993년 3월 27일.
  14. 선거 자금 폭로 파문/김유찬씨 일문일답·이명박 의원 일문일답”, 《경향신문》, (1996년 9월 11일).
  15. 이명박 의원 참모 2명 구속/선거비폭로 사건”, 《조선일보》, (1996년 9월 23일).
  16. “이명박 의원 어쩌자고…”/전격 서울시장 출마선언”, 《동아일보》, (1998년 2월 5일).
  17. 이명박씨 “시장경선 불참””, 《국민일보》, (1998년 4월 29일).
  18. 민변 “BBK 수사 공정성 의심…전면 재수사를””, 《한겨레》, (2007년 12월 13일).
  19. 절반 이상 “BBK, 안 믿는다””, 《KBS》, (2007년 12월 8일).
  20. 李 의혹 `모두 무혐의'.."도곡동 땅 이상은씨 소유"연합뉴스, 2008년 2월 21일
  21. <이명박 `노점상 소년서 대통령까지'>-3. '따뜻한 불도저' 시장, 《연합뉴스 TV》, 2007년 12월 20일.
  22. [1]한겨례 지자체 묻지마식 청계천 따라하기, 2008년 6월 27일
  23. “불도저라 불린 사나이, 청계천으로 대통령 되다”- NYT, 《뉴시스》, 2007년 12월 20일.
  24. 복원 다섯달, 청계천에 물이 '줄줄' 샌다,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6일.
  25. 개통된지 얼마됐다고…청계천 벽면 곳곳 균열, 《세계일보》, 2005년 12월 2일.
  26. 청계천, ‘물 값+전기료+관리비’ 등으로 혈세 ‘줄줄’, 《업코리아》, 2006년 11월 20일.
  27. [2],《오마이뉴스》, 2007년 8월 16일.
  28. 서울 시내버스 최고 2배 빨라졌다..대중교통 체계 개편이후 , 《한국경제신문》, 2007년 10월.
  29. Heroes of the Environment, 《타임》, 2007년 10월.
  30. 국제금융센터, AIG는 계약때부터 매각 계획, 《KBS》, 2007년 8월 21일.
  31. 박근혜 캠프 "이명박, 서울시 부채 5조 더 늘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3일).
  32.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명박 확정, 《연합뉴스》, 2007년 8월 20일.
  33. 이명박 43.9% · 이회창 17.5% · 정동영16.1% - 《조선일보》, 2007년 12월 7일.
  34. ‘섬기는 정부’ ‘실용정부’ 의지 행사장 곳곳에 반영”, 《한겨례》, (2008년 2월 25일).
  35. [3] 한겨레 대통령 지지율 좀 올랐다고 촛불 강경대응, 2008년 6월 27일
  36. 이명박 시장, '별장 파티' 의혹”, 《MBN》, (2006년 4월 17일).
  37. 李대통령 소유 빌딩, 여성접대부 영업 계속”, 《고뉴스》, (2008년 5월 3일).
  38. BBK 고소취하 온풍 불까”, 《내일신문》, (2008년 4월 25일).
  39. ‘꼬리곰탕 특검’ … 3만2000원짜리 정식 들며 조사”, 《중앙일보》, (2008년 2월 19일).
  40. 강만수, 대운하 '블도저식 강행' 선언”, 《뷰스앤뉴스》, (2008년 3월 1일).
  41. 학계, 대운하 반대에 나섰다”, 《이투데이》, (2008년 3월 14일).
  42. 바다·땅·교통 관할…대운하 ‘꼭 한다’ - 국토해양부”, 《한국경제신문》, (2008년 3월 12일).
  43. "오로지 영어만 몰입? 한마디로 미쳤다!!"”, 《브레이크뉴스》, (2008년 2월 12일).
  44. [4] 이명박 ‘5대 경제인맥’ 살펴보니… , 조선일보 2007년 12월 20일


이명박.. 청와대 홈피




이명박 대통령 사진
이 명 박 李明博 Lee  Myung-Bak 1941.12.19 ~
  • 생년월일 1941.12.19 (양력)
  • 본적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537
  • 본관 경주
  • 종교 기독교
  • 혈액형 B형
  • 자녀 1남 3녀
  • 신장/체중/시력 173cm / 70kg / 좌 1.0 우 1.0
  • 존경인물 안창호, 간디, 잭 웰치
  •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 가훈 정직
  • 취미 테니스, 수영
  • 결혼일 1970.12.19
  •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 아침이슬(양희은)
  •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보아, 비
  •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 장동건
  • 감명깊은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캐스트 어웨이, 벤허

학력사항

  • 1954 포항 영흥초등학교 졸업
  • 1957 포항중학교 졸업
  • 1960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 1965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98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
  • 2004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 2004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 2005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 2005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경력사항

  • 1965 현대건설 입사 (공채)
  • 1977~19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 1978~1981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78 한국도시개발(現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78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 1980 해외건설협회 업계대표 부회장
  • _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업계대표 부회장
  • 1981~1992 대한수영연맹 회장
  • _ 대한알루미늄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
  • 1982~1987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겸임
  • 1982~1992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 _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 _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 1983~1992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 1983~1992 해외건설협회 이사
  • 1983~1990 동남아 경제협력 건설분과 위원장
  • 1984~1992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 1984 세계수영연맹 집행위원
  • 1985~1986 한라건설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6~1999 주한부탄왕국 명예총영사
  • 1987~1992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8~1992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 1988~1992 현대엔진공업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8 한무쇼핑(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89~1992 한·소 경제협회 설립준비위원장 겸 부회장
  • 1989~1991 현대종합목재 대표이사 회장 겸임
  • 1990~1992 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회장 겸임
  • _ 한국항만협회 이사
  • 1991~1992 동북아 경제협력 민간협회 한국측 회장
  • 1992~19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이후 신한국당, 전국구)
  • 1992~1994 6.3동지회 회장
  • 1992~2007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 1993~1996 한국청년실업인협의회 회장
  • 1993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 겸 운영이사회장
  • 1994~2002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 1995 삼청로터리클럽 회장
  • 1996~1998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 서울 종로)
  • 1996 한국국악협회 고문
  • 1997 한나라당 종로지구당위원장
  • 1999~2002 아태 환경NGO 한국본부 총재
  • 2000~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 2000~2002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 2001~2007 해외한인무역협회 고문
  • 2001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 위원장
  • 2002~2006 서울특별시장(32대, 민선3기)
  • _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 2005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사 fDi 선정 2005 올해의 인물
  • 2007 한나라당 제 17대 대통령후보
  • 2008 제17대 대통령 취임

저서

신화는 없다 /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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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archjang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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